지금은 신길동 영등포동이 된 방아곶에 취암정(醉巖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다. 1757년에서 1765년 사이에 편찬된 <<여지도서>>에 소개되어 있는데 이세운(李世雲, ?~?)이 세운 정자라고 하였다. <<여지도서>> <금천현>을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취암정은 방학호(放鶴湖)에 있다. 좌랑(佐郞) 이세운(李世雲)의 정자이다. 방학호(放鶴湖)는 방아곶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보통 방하곶(方下串)으로 썼지만 방학호로도 썼다. 그리고 이세운(?~?)은 조선 숙종(肅宗) 때 문신(文臣)으로 숙종 25(1699)년 성균관(成均館)에 기숙하는 재생(齋生)들의 임원인 재임(齋任)에 뽑혔고, 29(1703)년에는 영릉참봉(英陵參奉)이 되었으며, 32(1706)년에는 헌릉봉사(獻陵奉事)가 되었고, 39(1713)년에는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던 분이다. 그러나 취암정은 <<여지도서>> 이후 지리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정수영(鄭遂榮, 1743~1831)이 1796년 여름부터 1797년 봄까지 한강 임진강 일대를 유람하고 그린 <<한임강명승도권(漢臨江名勝圖卷)>에 금천현 동쪽의 취향정(翠香亭)이 나오는데 취암정을 잘못 기록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서로 다른 정자일 수도 있지만 혹 취암정을 취향정이라고 했는지 알 수 없다. 취향정에 대한 기록은 지리서에 등장하지 않는다. 이세운 어른의 후손이나 이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는 분이 나타나기를 기대해 본다. 또한 양화동 양화나루 위에는 영호루(影湖樓)라는 정자가 있었다. 영호루는 침호루(沈湖樓)라는 또 다른 이름이 있다. <<여지도서>>를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영호루(影湖樓)가 양화진(楊花津) 위에 있다. 달리 침호루(沈湖樓)라고도 한다. 그러나 영호루에 대한 기록은 <<여지도서>>가 유일하다. 그 후 어떤 기록에서도 영호루를 찾을 수가 없다. 어찌 된 노릇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누가 세운 정자인지도 정자가 있던 자리도 알 수 없다. 이 역시 혹 내막을 알고 있는 분이 나타나기를 기대할 수 밖에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