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의 <삼유당기>는 <<여지도서>> <금천현>에 실려 있다.
삼유당(三悠堂)은 우와피(牛臥陂) 조처사(趙處士) 석명(錫命) 별서(別墅)이다.
도암(陶庵) 이재(李縡) 당기(堂記)를 지어 가로되
삼유당(三悠堂)은 고(故) 삼유옹(三悠翁)이 지은 것이다. 옹(翁)이 일찍이 경행(經行)으로 천거되어 늦게 일명(一命 : 낮은 벼슬)에 나갔으나 기사사화(己巳士禍, 1689)가 일어나자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관악(冠岳)산 아래에서 늙었다. 그의 노래에 가로되
山悠悠 산이 유유(여유(餘裕)가 있어 한가(閑暇)로운 모양)하고,
水悠悠 물도 유유하고,
人亦悠悠 사람 또한 유유하다.
라고 하였는데 당(堂)의 이름은 아마 여기에서 연유할 것이다. 또 근체시(近體詩) 한 수가 있어 그 뜻(지(志))을 볼 수 있다. 재(縡)가 어렸을 때 옹(翁)을 뵌 적이 있는데 용모와 모발이 고상하고 고풍스러워서 속세의 기운이 없었다. 지금 그 노래를 읽어보니 그 분을 뵙는 것 같다. 내가 옛날 그 당(堂)에 한 번 올라서 올려다보고 내려다보며 경치를 즐기면서 가로되
저 두 유유한 것은 진실로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건만 다만 옛사람의 가슴속이 어땠는지는 모르겠다. 흐르는 물이나 솟아오른 산이야 무심(無心)하지만 사람은 유심(有心)하니 이에는 반드시 마음속에 은연(隱然)히 서로 뜻이 맞는 것이 있었겠으나 지금은 모습도 생각이나 취미도 찾을 수 없으니 그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겨 탄식하고 떠나지 못하겠다.
라고 하였다. 그 사손(嗣孫 : 장자(長子)) 완벽(完璧)씨가 나이 70여 세에 가문을 잘 지켜 마음에 꾀하는 바가 없고, 세상에 구하는 바가 없으며, 백발(白髮) 창안(蒼顔)에 그 사이에서 늙어가니 시(詩 : 시경(詩經))에 가로되
雖無老成人 비록 노성한 신하 없어도
尙有典刑 오히려 법이 있지 않은가!(<<시경>> <탕지십(蕩之什)>)
라고 한 것이 이를 이름이구나! 공(公)은 나에게는 장인(丈人)의 항렬로 평소 그 덕을 존경하였는데 그 분의 여러 자손들을 보니 모두 예의와 법도를 지키고 공경하고 삼가서 스스로 경계하니 조씨(趙氏)의 경사가 아마도 그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면전에서 칭찬하여 가로되
세상의 부귀(富貴)한 사람들이 대(臺)를 짓고 정자(사(?))를 지으니 크고 넓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으나 한 두 세대 전해지기가 어려운데 이 당은 어떠할 것 같습니까? 공은 이미 편하고 걱정 없어 즐겁고, 또한 수(壽)까지 누리셨으니 여러 자손들이 이 당에서 효도하고, 이 당에서 우애하며, 이 당에서 독서하여 구원(九原 : 구천(九泉))에 계신 선대부(先大夫 : 조완벽의 아버지 조석명)께 허물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공이 가로되
좋구나! 이 밖의 온갖 일이 모두 유유(悠悠)할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
공이 스스로 유시(遺詩)에 화답하였는데 사대부(士大夫)들이 많이 그에 화답하였다.
나는 시에 능하지 못하여 이 말을 서술하여 기로 삼는다. 라고 하였다.
조석명(趙錫命, ?~?)은 조선 숙종 7(1681)년 사산감역(四山監役)이 되었다.
사산은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네 산으로 백악산(白岳山) 목멱산(木覓山) 인왕산(仁王山) 타락산(駝酪山)을 일컫는 말이며, 사산감역은 사산재식감역관(四山栽植監役官)의 준말로 사산에 소나무를 심고 그 벌목을 금하는 일을 감독하던 종9품의 벼슬아치인데 영조 때 참군(參軍)으로 고쳤다.
조완벽(趙完璧, ?~?) : 조석명의 아들이다.